태산의 왕 #1
한울은 태어날 때부터 산속을 거니는 것을 좋아하며, 여유롭게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그의 부모는 한울이 호랑이의 혈통을 타고났음에도 범의 날카로운 기세를 지니지 않은 것을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나 한울은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와 다투는 것보다 풍류를 즐기는 삶을 더 좋아했으며, 언제까지나 태산과 하나가 되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길 원했다.
그런 한울에게 술을 건넨 이가 있었다. 드높은 태산의 기운을 받아들여 신수가 된 자였다. 한울은 갑자기 나타난 그가 준 술을 받아 마셨고,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이에 한울은 그를 ‘무명’이라 멋대로 불렀고, 무명은 편할 대로 부르라며 개의치 않았다.
태산의 왕 #2
무명은 한울에게 여러 약초를 조합해 약수를 빚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한울과 함께 있는 듯, 혼자인 듯 시간을 보내다 결국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한울은 그의 뒤를 이어 태산의 기운을 받아들여 깨달음을 얻었고, 비로소 신수로 거듭났다.
그를 추종하는 수인들은 한울을 ‘태산의 왕’, 혹은 ‘산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군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귀찮게 여겼다. 결국 그는 속세와 선계의 경계에 위치한 중천에 터를 마련하고, 그곳을 ‘청연도원’이라 이름 지었다.
신녀와 백수당 #1
구미호 신녀가 산군을 찾아왔다. 먼 옛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령주’가 되어 세계의 상처를 봉합하고 공허와의 전쟁을 종식시킨 존재. 그 후손들 또한 운명의 신을 모시는 역할을 이어받아야 했다. 산군은 그녀를 가련한 자라 여겼다. 자유와 풍류를 중시하는 그로서는 단 하루도 신녀의 삶을 견딜 수 없었다.
구미호 신녀는 극동의 백성들을 살필 수 있는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는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신녀로서의 과업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산군은 백수당 결성이 신수들의 힘이 남용되지 않도록 억제하기 위함임을 꿰뚫어 보았다.
산군은 신녀의 이름을 알려준다면 자신의 이름 정도는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신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이내 ‘미호’라고 답했다.
신녀와 백수당 #2
신수들의 모임, 백수당이 결성되었다. 백아 외의 극동 지방, 쿠로가네와 창천에 터를 잡은 신수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서리폭풍 서슬과 제천대성 오공의 지지를 받아낸 백수당의 결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편, 산군은 백수당이 결성된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백수당에 소속된 신수들이 자신의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도록 눈치를 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산군을 넘어설 수 있는 이는 없었기에, 누구도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산군은 신수의 힘을 억제하면서까지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미호를 기이하게 여겼다. 타인의 운명을 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이를 남용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신기할 뿐이었다.
신녀와 백수당 #3
산군은 미호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계속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너무나 달랐고, 그로 인해 더욱 궁금증이 생겼다.
미호가 가꾸는 서천의 꽃밭을 찾아가게 되는 것도, 꽃밭을 가꾸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단순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관심이 점차 사랑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산군은 깨닫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짧은 생을 사는 자들이 겪는 열병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신수가 된 후,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자신의 본명을 그녀에게 알려준 것도 단순한 변덕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한울’이라 불러주는 존재는 오직 미호뿐이었다.
백아 통일
산군은 백수당 결성에 이름만 빌려주겠다고 했으나, 의외로 많은 시간을 미호와 백수당을 위해 썼다. 그가 처음 나선 일은 백아의 오랜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백아에서는 인간과 도깨비, 그리고 수인들이 크고 작은 전쟁을 벌여왔다. 산군은 미호와 함께 수인 종족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도깨비의 호전성을 억누르며 그들에게 수라에 정착할 기회를 주었다. 도깨비가 수라를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반발을 잠재웠다. 또한 인간과 수인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 결과, 백아의 인간들 또한 산군과 미호를 따르게 되었고, 마침내 백아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도깨비 토벌
미호는 신수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속세의 사람들이 신수의 결정만을 기다리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힘을 잃어가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백아의 안정을 되찾은 후에는 개입을 최소화하려 했다.
도깨비들이 수라 내 여러 마을을 힘으로 다스리는 것까지는 용인했다. 극동 대륙의 백수당 신수들은 도깨비들의 행위를 화합을 위협하는 요소로 보고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산군은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산군은 미호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녀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미호는 도깨비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고 여겼고, 다른 종족들이 수라를 도깨비에게 내어주고 자신들은 남령과 무원에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결론이 도출되든, 그들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를 바랐다.
그러나 도깨비들은 미호의 신뢰를 저버렸다. 그들을 이끄는 수장, 두억시니가 약속을 어기고 수라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산군은 즉시 백수당을 움직여 두억시니를 비롯한 모든 도깨비를 사당 하나에 봉인해버렸다.
이는 재발을 막기 위한 단호한 처벌이자, 미호의 믿음을 저버린 것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었다.
신녀의 곁에서 #1
구미호 신녀는 정을 통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쌓아온 신력을 매개로 단 한 명의 후계자만을 잉태한다. 미호 역시 그 운명을 따랐고, 의무를 이을 아이를 낳았다.
구운묘로 찾아갔을 때, 미호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호는 산군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고, 그는 ‘미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산군은 미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미호의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후계를 잉태한 구미호 신녀는 백 년 후 등선하여 속세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 그것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슬퍼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는 순리였다.
신녀의 곁에서 #2
미나가 태어난 지 일 년이 되던 해, 백아 땅에 마수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신수의 힘 없이 마수에 맞선다면 반드시 큰 희생이 따를 것이었기에, 산군은 미호와 함께 마수 토벌에 나섰다. 그럴 때마다 미나는 구운묘에 남아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호는 미나가 혼자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단순히 마수 토벌이 이어지는 이 시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등선한 후 천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홀로 외롭게 살아가지 않길 바랐다. 그것은 백수당을 결성하고, 수많은 이를 보살필 때 그녀가 보였던 자애로움이나 사명감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신녀의 곁에서 #3
미호가 또 한 명의 아이를 낳는다면, 그녀는 천 년의 삶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등선할 수 없으며,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곧 영원한 이별이 될 터였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복잡한 생각을 떨쳐낸 산군은, 언제나 그랬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하라고.
줄곧 신녀의 의무에 얽매여 살지 않았느냐고.
미나에게도 가족이 생기면 좋을 거라고.
그렇게 미호는 미나의 동생, 나래를 낳았다. 산군은 자신의 힘을 쏟아부어 미호가 진기를 모두 소진하지 않도록 도왔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3년. 그는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미호에게 남겨주고 싶었다.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와의 추억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것뿐이었다.
독수의 참변 #1
매년 그랬듯이, 산군은 미호와 함께 환영원에서 열리는 성혼제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는 딱히 할 일이 없었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드러누워 약수를 홀짝이는 것이 전부였다.
미호의 화려한 강신무가 절정에 이를 무렵, 사건이 발생했다.
마수 토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뱀 일족의 족장, 나운이 짙은 독기를 터뜨려 환영원을 뒤덮은 것이다.
산군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모두가 무사할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퍼져나가는 독기의 근원을 되돌리는 것만이 피해를 최소화할 유일한 길이었다.
산군은 독기를 역류시켜 나운에게 되돌렸다. 미호는 그에게 몰려든 독을 정화하려 했으나, 독기는 이미 깊숙이 스며들어 그의 두 눈을 앗아가 버린 후였다.
독수의 참변 #2
사건이 일단락된 후에야, 산군은 나운과 그의 일족이 겪어온 수모를 들었다.
그들은 마수 토벌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독기 가득한 땅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산군은 혼란스러웠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삶을 원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아온 그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터전이 강요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운의 분노를 이해했고, 나운이 품었던 그 울분을 되돌려 그의 두 눈을 앗아간 것을 후회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이토록 끔찍한 기분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별
어느 날, 미호가 청연도원을 찾아와 삼지창을 건넸다. 그것은 구미호 신녀가 신령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신칼, 화운이었다.
산군은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미호는 이제 속세를 떠난다.
그러나 그녀가 향할 곳은 선계가 아니다.
미호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 미나를 품에 안았을 때, 미나를 바라보며 지어 보였던 그 미소였다.
그렇게, 그녀는 떠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미호가 떠난 후에도 산군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정자에 걸터앉아 호리병을 기울였고, 때때로 청연도원을 떠나 배를 띄워 풍류를 즐기거나 산속을 거닐었다.
그러다 문득, 미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구운묘를 찾아가면, 그녀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재미있는 인간 #1
세상을 떠돌던 중, 산군은 당돌한 인간과 마주쳤다.
이호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무작정 창을 휘두르는 모습이 흥미로워 지켜보았다. 어쩌면 미호를 잃은 슬픔을 견디기 위한 일종의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산군의 눈에는 이호의 문제가 단번에 보였다. 그가 익힌 창술은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과도 같았다. 이호는 자연을 받아들이고, 야생에서 죽음과 맞닿은 실전을 겪으며 성장해야 하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창을 아무리 휘둘러도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우스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점이 제법 보기 좋았다.
그래서 산군은 이호가 맞는 옷을 입어볼 수 있도록,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재미있는 인간 #2
이호는 자신이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무식한 건지, 무심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산군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런 놈들이 있어서 미호가 그토록 속세에 관심이 많았던 걸까?
산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호와 말문을 튼 뒤, 그를 데리고 다녔다. 나룻배를 띄워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자신의 약수를 마시게 해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도록 도왔다. 심지어 위험하다고 알려진 산에 던져 넣어 맹수나 요괴와 사투를 벌이게 만들기도 했다.
이호는 느렸지만 착실하게 실력을 키워냈고, 결국 산군이 만족할 정도로 강해졌다.
그 덕분에, 산군은 잠시나마 상실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상실
이호와의 인연은 산군을 조금이나마 살아가게 만들었으나, 그의 깊은 상실을 치유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일 년, 이 년… 시간이 흐를수록 산군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응어리는 점점 커져 갔다. 그것은 서서히 그의 내면을 좀먹었다.
미호를 향한 그리움은 결국 비뚤어진 생각을 만들어냈다.
모든 이를 위해 살아가면서도 외로움을 견뎌야만 하는 신녀의 삶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백아, 나아가 극동 대륙의 인간들에게 과연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그러나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위로는 미호가 백아의 사람들을 사랑하던 모습이 겹쳐졌다.
상반된 두 감정은 산군의 내면을 갈가리 찢어놓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청연도원에 가두기로 결심했다.
청연도원의 밖으로 나선 자신이, 미호의 복수를 명목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